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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마른 흔적이 있는 왼쪽을 고른다

[player]왼쪽으로 가자. 힐리가 다친 두루미를 구해 낸 시점을 생각해 봤을 땐, 그때 잡혀들어 왔다면 운반 중 흘린 분변은 지금쯤 다 말랐겠지.
문 앞으로 다가간 우리는, 문에 자물쇠가 걸려 있지 않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리고 가볍게 문을 밀자 안에서부터 진한 소독약 냄새가 풍겨왔다.
들어가서 살펴보니, 안에는 정말로 새장들이 잔뜩 있었다. 전부 비어 있었지만.
[힐리]보아하니 동물을 옮긴 다음 소독을 한 지 얼마 안 됐나 본데.
우리는 서로의 눈을 마주쳤다. 그렇다면야, 답은 당연히 다른 창고에 있겠지. 앵무가 먼저 달려 나가 자물쇠를 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나타난 건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그리고 눈이 미처 적응을 하기도 전에 조류의 분변 비슷한 냄새가 풍겨왔는데, 앵무가 휴대폰의 플래시를 켠 뒤 수차례 흔들자 조용했던 창고는 순식간에 새소리와 날개 퍼덕거리는 소리, 새장이 흔들리는 소리로 가득 차 버렸다.
힐리가 벽을 더듬어 불을 켰다. 환해진 창고의 모습은 우리를 경악케 했다. 100마리가 넘는 서로 다른 새들이 크고 작은 우리에 갇혀 있던 것이었다.
[player]우리 셋이서 구하기엔 수가 너무 많은걸……
눈앞의 새들을 본 앵무는 눈섭을 찌푸리더니 내게 말했다.
[앵무]그 두루미 새끼 두 마리, 찾을 수 있지? 우선 목표부터 구하자고.
[player]두루미는 구별하기 쉽게 생겼으니까…… 어디 보자.
새장을 돌아다니며 살펴보니, 청소를 자주 하는 건 아닌 듯 분변과 깃털들이 잔뜩 널부러져 있었다. 저 새들이 지내기엔 분명 열악한 환경으로 보였다.
[player]앗, 찾았다!
나는 안쪽에 있는 큰 우리에서 눈에 띄는 붉은색을 두 개 발견했다. 다가가 보니 여러 새가 함께 갇혀 있는 모습이 보였는데, 제대로 못 먹어서 말라 보이는 새들 사이에 두루미 두 마리가 끼어 있었다.
힐리를 부르려 하던 난, 그녀가 우리에 갇힌 다른 새들의 상태를 뚫어져라 확인하고 있는 걸 발견했다.
[player]힐리?
[힐리]그게…… 내 생각엔, 두루미 두 마리만 구해서 나가는 건 안될 것 같아. 모두 자연 속에 있어야 할 녀석들을 사람들의 거래 대상이 되게 놔둘 수 없어.
[player]하지만…… 겨우 우리 셋 가지곤……
그 순간, 저번에 경찰한테 신고했을 때 경찰이 무슨 소식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전화번호를 남겨줬던 게 기억났다. 소우무가 너무 무모하게 행동할 시 상대 측에서 '증거 인멸'을 시도할 수 있다고 경고한 탓에, 원래는 두루미를 안전하게 구해내고 난 뒤에 다시 신고할 생각이었지만……
보아하니, 계획을 앞당겨야 할 것만 같았다.
[player]힐리, 내 생각엔 우리 셋이선 이 새들을 다 구해 낼 수 없어. 아무도 안 막는다고 가정해도 우리 힘으론 밖으로 옮길 수조차 없잖아.
[player]차라리 경찰한테 처리를 맡기는 건 어때? 지금은 증거도 많으니까 말이야.
[힐리]나도 마침 그렇게 생각했어.
[힐리]사실 진작에 눈치챘어야 했어. 야생동물 밀매를 전문으로 하는 녀석들인데, 겨우 몇 마리만 잡아 놓았을리 없잖아. 이렇게 큰 창고까지 대여했는데……
[player]요즘 너무 바빴던 나머지 미처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거겠지.
[힐리]그럴 수도……
말하던 도중, 힐리는 갑자기 침묵했다. 사진을 찍어 증거를 경찰에게 보내던 와중 고개를 돌려 보니, 힐리의 눈빛이 새장 뒤편을 향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왜 그러는지 물으려던 찰나 힐리는 '쉿' 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힐리]쉿… 잘 들어봐, 어디서 동물 소리가 나는 것 같지 않아?
[앵무]여긴 사방이 동물들인데?
[힐리]아니, 새 말고. 들짐승 소리 말이야.
[힐리]……익숙한 소리야, 마치…… 새끼 표범이 구해달라고 하는 것만 같은.
숨을 참고 귀를 기울이자, 새소리와 날개 퍼덕이는 소리 사이에서 정말로 가느다란 고양이 소리 비슷한 걸 들을 수 있었다.
힐리가 성큼성큼 걸어가 새장을 밀자, 그 뒤에 가려져 있던 문이 드러났다. 숨겨진 채로 있던 문은 따로 잠겨있지도 않았다. 문을 열고 빛이 그 안으로 새어 들어가자 힐리를 뒤따르던 우리는 잔혹한 광경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창고에는 포유류들이 잔뜩 갇혀 있었다. 바깥의 새들과 달리 안에서 굉장히 오랫동안 갇혀 있었는지 피골이 상접해 있었고, 털은 윤기를 모조리 잃은 상태였다.
휴대폰의 플래시를 켠 힐리는 소리를 따라 케이지들을 비춰보다가 삐쩍 마른 표범 한 마리를 발견했다. 이미 병에 걸린듯 상태가 좋아보이지 않았다.
녀석은 힐리를 발견하고선 고개를 들어 바람이 새는 듯한 소리를 냈다. 방금 우리가 들은 구해 달라는 소리와 같은 소리였다.
힐리는 자물쇠를 찾기 위해 케이지를 한 바퀴 돌았다. 그때, 밖에서 요란한 발소리들과 그 사이에 섞인 경비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경비A]누군가 침입했습니다, 빨리 수색해야 합니다!
우리는 즉시 숨을 죽이고 바깥 상황에 귀를 기울였다. 발자국 소리와 대화 소리로 추정컨대, 아마 순찰하던 네 경비가 다 온 것 같았다.
[경비B]아, 아. 여기는 2호 창고, 증원을 요청한다. 반복한다, 증원을 요청한다……
[player]지원을 요청하고 있어. 이대로 있다간 경비들이 더 늘어날 거야.
휴대폰을 흘긋 바라본 앵무는, 조금 다급해진 듯 우리를 바라보았다.
[앵무]보스가 우리더러 빨리 철수하래, 밖에 경비 회사 차량이 몇 대씩이나 이쪽으로 오고 있다나 봐.
[앵무]어서, 지금 나가야 해. 안 그럼 못 도망칠 거야.
나는 힐리의 손을 잡아 끌었으나, 힐리는 괴로운 눈빛으로 눈앞의 케이지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힐리]앵무, 미안한데 PLAYER 데리고 먼저 좀 가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