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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심 싸움이라도 굳이 끝까지 갈 필요는 없지, 그만 할래.

[player]설마 바이크로 무슨 산악 자전거 체험 같은 걸 시켜 주려고 이러는 거야? [쿠츠지]형씨,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산악 자전거 따위가 내 바이크만큼 신날 리가 없잖아. [쿠츠지]산악 자전거 따위는 기껏해 봐야 4D 영화를 보는 수준이라고. 의자 몇 번 흔들어 주고, 3D 안경 하나 씌워 주는 거랑 다를 것도 없지. [쿠츠지]…… [쿠츠지]못 믿겠으면 다시 두 바퀴쯤 더 돌아줄 수도 있는데. 하지만 내 이성이 그런 걸 꼭 경험해 볼 필요는 없다고 속삭여 왔다. 무의미한 고집을 부려봤자 딱히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으니 말이다. 예를 들자면, 선생님 머리에 지우개 가루를 맞추는 걸로 내기를 한다거나, 자신의 용기를 증명하려고 한겨울에 철제 난간을 핥는다거나, 회의 시간에 큰소리로 '사장님 지시 말고 제 방식대로 할게요.' 같은 말은 한다거나 하는 일들 말이다. 나처럼 이미 어느정도 성숙한 사람이라면 이런 무의미한 도발에 다시 걸려들지는 않을 것이다. [player]됐어, 고맙지만 사양할게. [player]일단 어디 적당한 곳에서 거래를 마무리 짓자고. [쿠츠지]하아, 그것 참 아쉽네. 그럼 꽉 잡으라고 형씨, 좋은 곳에 데려다 줄 테니까. [player]어딘데? [쿠츠지]가 보면 알 거야. 그리고 난 결국, 아까 지나쳐온 풍경을 다시 '되감기'하게 되었다. 유일하게 달라진 점은 거리 하나를 지나자 도로가 젖어 있었다는 것. 아마 비가 내렸던 듯했다. 길은 조금 미끄러웠다. 쿠츠지가 내 목숨이 아까운 줄은 몰라도 자기 목숨 만큼은 소중했는지 운전이 확연히 부드러워졌다. 비가 내린 뒤의 바람이 살갗에 시원하게 불어오자 어쩐지 감동마저도 느껴졌다. 슬슬 드라이브가 끝나고, 우리가 도착한 곳은 '기도춘' 근처에 있는 한 찻집이었다. 요즘 이 근처를 자주 방문해서 그런지 주변의 경치도 꽤나 익숙해졌다. 나는 쿠츠지의 뒤를 따라 찻집의 뒷문으로 들어가서, 그대로 2층의 별실로 향했다. [player]여긴 갑자기 왜? [쿠츠지]멋진 공연을 보여주러 왔지. [쿠츠지]여기야말로 최고의 관람석이라고. 공연이 있을 때마다 늘 여길 예약하는데, 경쟁이 저번 경매만큼 치열해. 창문으로 머리를 내밀어 밖을 바라보니, 찻집의 정문 앞 거리가 바로 보였다. 거리에 사람들이 빽빽히 들어차 있는 모습이, 저번에 꽃 경매를 하던 그때에 뒤지지 않는 것 같다. [쿠츠지]'오이란 퍼레이드'라고 들어봤어? [player]응. [쿠츠지]'기도춘'에도 그런 관습이 있지. 정기적으로 길한 날을 고른 다음, 가장 인기 있는 게이샤에게 화려한 옷을 입혀서 '기도춘'의 입구부터 이 길의 끝까지 갔다가 돌아오게끔 해. 이게 바로 기도춘의 '오이란 퍼레이드'야. [쿠츠지]첫째로는 '기도춘'의 게이샤가 최고라는 걸 과시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고, 둘째로는 이 일대가 전부 '기도춘'의 것이며, 가장 뛰어난 게이샤만이 '기도춘'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 주려는 것이지. [쿠츠지]따라서, 자신의 능력을 확인하고 위치를 과시하는 의미도 있다는 거야. [쿠츠지]십수 년 전, 아직 소녀였던 토죠 쿠로네가 자신의 재능과 미모로 모든 이들을 압도한 뒤로부터 아직까지 '기도춘'의 주인은 바뀐 적이 없어. [쿠츠지]그래서 오늘날 '오이란 퍼레이드'를 책임지는 게이샤는 항상 그녀지. 쿠츠지의 말이 끝나자마자 환호와 함께 '기도춘'의 문이 열렸다. 우선은 전통 복식을 한 남자 몇 명이 목판을 들고 걸어나와 도로의 양측에 섰다. 목판엔 '기도춘'의 문양이 커다랗게 그려져 있었고, 무언가 글씨도 써져 있었지만 크기가 작아 내용은 보이지 않았다. 그 뒤로는 아름다운 옷을 갖춰 입은 소녀 여섯이 손에 꽃바구니를 든 채로 양측으로 나뉘어 걸어나왔다. 그러면서 바구니에서 꽃을 집어들어 옆으로 놓으니, 정 가운데의 길에 딱 맞게 꽃이 떨어졌다. 리듬감 있는 음악과 함께 흰 버선을 신은 나막신이 문 밖으로 살포시 뻗어나와 반달 모양을 그리고선 다시 쏙 들어가는 광경을 보았다. 마치 매끄러운 잉어가 수면 위로 빼꼼 나왔다가 꼬리를 살랑 흔들고 다시 사라지는 모양새였다. 그리고 그걸 몇 차례 반복하더니, 화려한 옷을 입은 여자가 그제서야 몸을 드러내며 매혹적인 발걸음으로 걸어나와 꽃길을 또각또각 걸어갔다. 하지만 거리가 조금 먼 데다가 구슬을 엮어 만든 듯한 면사포를 쓰고 있는 탓에, 그 모습이 잘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쿠츠지는 딱히 관심 없다는 듯 창틀을 두드리며 가볍게 말을 이었다. [쿠츠지]저 사람, 저 사람이 바로 토죠 쿠로네야. 들려오는 곡조에 맞춰, 쿠츠지의 손가락이 리듬감 있게 창틀을 두드렸다. 마치 저 아래의 공연에 푹 빠져든 듯한 모양새였다. 이어서 토죠 쿠로네가 우리의 바로 밑을 지나가려 하자, 쿠츠지는 갑작스레 고개를 돌리곤 날 바라보았다. [쿠츠지]형씨, 거래를 하기 전에 알려줘야 할 게 있어. [player]뭔데? [쿠츠지]내가 형씨를 경매에 보내고, 그 뒤에 이것저것 시킨 일들. 왜 그랬는지 궁금하지? [player]그렇긴 해. 딱히 가치 있는 정보를 물어왔다는 느낌은 못 받았거든. [쿠츠지]아니, '형씨'가 갔다는 사실 자체가 가치 있는 정보였어. [player]그게 무슨 말이야? [쿠츠지]그날, 형씨가 무슨 꽃을 고르든 토죠 쿠로네를 만날 수 있었다고 하면 어쩔래? [player]셋 다 토죠 쿠로네의 꽃이었던 거야? [쿠츠지]아니, 그녀가 형씨를 보고 싶어했기 때문이야. [player]뭐라고? [쿠츠지]처음부터 난 내가 지닌 정보로 추측을 했을 뿐이야. 하지만 형씨의 행동이 그 추측을 검증해 주었지. 쿠츠지의 말을 들은 나는 더욱 혼란에 빠졌다. 나와 토죠 쿠로네 사이의 접점을 아무리 찾아본들, 그녀가 내게 먼저 다가올 이유 따윈 전혀 찾아볼 수 없었으니 말이다. [쿠츠지]형씨. 이전에 한 거래는 여전히 유효하지만, 형씨를 위해 거래의 조건을 바꿔 주도록 하지. 지금부터, 형씨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어. [쿠츠지]첫째, 약속에 따라 내게서 힐리에 대해 묻는 것. 요즘 그녀가 뭘 하고 다녔는지 알려 주지. [쿠츠지]둘째, 스스로를 위해 토죠 쿠로네와 관련된 것들을 질문하는 것. 그럼 내가 형씨한테 쓸모 있는 부분들을 추려서 알려 주겠어. [쿠츠지]생각할 시간을 줄게, 형씨가 진정으로 원하는 선택을 내릴 수 있기를 바라지. 난 쿠츠지의 말을 듣고선 고민에 빠졌다. 원래대로라면 힐리에 관한 것을 묻는 게 맞겠지, 이거야말로 내가 의뢰를 수락한 이유였으니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토죠 쿠로네가 어째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고 싶기도 했다. 이제 와서 보니, 그날 그녀가 꺼냈던 이야기들엔 무언가 깊은 뜻이 숨어 있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평범했던 것들이, 실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던 걸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한참을 고민해 봐도 선택을 내리기는 힘들었다. 사라와 라이언의 걱정하는 얼굴이 내 머릿속에서 번갈아가며 나타났다가도, 동시에 귓가에 토죠 쿠로네의 나긋나긋한 속삭임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쿠츠지]하아… 있잖아, 형씨가 좀 더 스스로를 위한다고 해도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렇다면,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