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are here

포도덩굴 밑에 가서 앉는다

정원에서 가장 나의 시선을 끌었던 것은 구석에 있던 포도덩굴이었다. 물론 장시간을 걸어온 탓에 목이 말라 과일이 먹고 싶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직감이 말해 주고 있다, 이 포도넝쿨에는 분명 이야기가 있을 거라고. 나는 포도 넝쿨 밑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희미한 약초와 과일의 달콤한 향이 코를 자극하자, 난 어느새 눈을 감고 숨을 깊게 들이쉬게 되었다. [아케치 히데키]지금은 포도가 익을 무렵이죠, 맛 좀 보시겠어요? [player]그래도 괜찮아? 히데키는 내 질문에 행동으로 대답했다. 그는 곧장 포도 한 송이를 따 우물에서 헹궈 낸 뒤 접시에 담아 내게 가져다주었다. 접시에 담긴 포도는 한 알 한 알이 먹음직스러웠고, 자색 껍질이 은은한 녹색을 띠며 빨리 한 입 맛보라는 듯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한 알을 따서 입에 넣자 새콤달콤한 과즙이 터져 나오며 입안을 적셨고, 산뜻한 포도의 향기와 부드러운 과육이 혀끝에서 녹아내리며 여름 더위를 날려 주었다. [player]달콤해…… [아케치 히데키]이건 할머니께서 직접 고르신 품종이에요, 가장 단 포도 품종으로 고르셨죠. 재배하면서 제가 실수로 잎을 하나 밟은 적이 있는데, 그것만으로도 할머니께서 한동안 속상해 하실 정도였어요. [player]네가 직접 재배한 거야? 오오, 정말 흥미로운걸. 하지만 네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땀 흘려가며 흙을 파는 모습은 상상하기 힘드네. [아케치 히데키]확실히 고생이었죠. 흙을 나르는 것만 수십 번이었고, 재배하고 나서도 메우고 다지고…… 하지만 그때 온 신경은 '나만의 포도 덩굴이 곧 생긴다'는 꿈에 집중되서 힘든 줄도 몰랐어요. [아케치 히데키]하지만 만약 그때 이 포도 덩굴이 시원한 그늘이 될 뿐만 아니라 공포의 무대가 될 줄 알았다면, 그다지 적극적이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겠네요. [player]무대? 포도 덩굴? 알아듣기 힘든 이야기인걸…… [아케치 히데키]정확히는, 할머니만의 무대였죠. 포도 덩굴은 햇빛을 향해 뻗어 있었고, 가지와 잎이 벤치보다 한 뼘 더 뻗어나와 녹음을 이뤘다. 히데키는 내 옆에 앉았고, 빛은 덩굴 사이의 작은 틈을 통과해 그의 옷에 빛의 얼룩을 만들었다. [아케치 히데키]더운 여름에 이 포도 덩굴은 햇빛을 막아 주는 영웅이 되지만, 해가 지면 결국 또 다른 얼굴을 드러내요. [아케치 히데키]덩굴은 달빛마저 가려서 벤치 주변을 더 어둡게 만들죠. 밤바람이 몰아치면 포도 덩굴이 괴상한 소리를 내면서 마치 내 뒤에 누군가 있는 듯한 느낌을 주고요…… [아케치 히데키]할머니는 이런 분위기를 만들어선 제게 괴담들을 들려 주곤 하셨어요. 빨간 원피스 소녀라던가, 13층의 계단이라든가, 철길 옆의 괴성, 그리고 방과 후에 나타나는 거대한 마스크를 찬 여인 같은 것들…… [player]마스크를 벗곤 “나 예뻐?”라고 물어보는 이야기지? 나도 들어봤어. 어떻게 대답하든 죽을 때까지 쫓아온다고 해서 생각이 많아졌지. [아케치 히데키]하하, 맞아요. 웃지는 말아 주세요, 그 이야기들을 들은 이후로 핑계를 대서 한 학기 동안 학교에 데리러 와 달라고 부탁을 드릴 정도였다니까요. [player]풉, 할머니가 의도치 않게 어린 시절 흑역사를 만들어 줬네, 할머니도 알고 있어? [아케치 히데키]의도치 않았다라기보다는, 그게 바로 할머니의 목적이었던 거죠. [player]응? [아케치 히데키]아버지의 영향으로, 저는 습관적으로 사람들과 '안전 거리'를 유지하면서 살아왔어요. 아버지께서는 다른 사람이 저의 생각을 꿰뚫어 보지 못하게끔 했죠, 그리고 설령 그게 가족이라도 예외는 없었어요. [아케치 히데키]하지만 할머니는 반대했어요. 할머니의 관점에서 가족이란 서로에게 방패가 되어 줘야만 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더욱 친밀해져야 한다고 믿으셨거든요. [player]그 말은, 할머니가 널 그렇게 놀라게 만들었던 건 네가 도움을 요청하길 바라서였던 거야? [아케치 히데키]네, 정확해요. 그리고 할머니는 일부러 절 놀라게 만들기도 하셨어요, 악취미죠. [player]예를 들면……? [아케치 히데키]아, 방금 전부터 물어보고 싶었는데, PLAYER 씨의 어깨 위에 있는 인형은 어디서 사신 건가요? [player]……무슨 인형? 히데키가 갑자기 화제와 상관없는 질문을 던졌다. 나는 아무것도 없는 자신의 어깨를 바라보며 번뜩 떠올렸다, 설마…… 무슨 불길한 거라도 본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갑자기 귓가에 서늘한 바람이 스쳐지나며 식은땀이 흘렀다. 그리고 놀란 나는 신속히 히데키 쪽에 붙어 그의 옷깃을 붙잡았다. [아케치 히데키]바로 이렇게요. [player]……이! 제! 그! 만! 오늘 밤엔 악몽을 꾸고 싶지 않다고! [아케치 히데키]PLAYER 씨, 그럼 저를 의지하셔도 괜찮아요. 저의 어깨를 내어 드리죠. [player]이게 할머니가 널 위로하던 방법이야? [아케치 히데키]할머니는 무서워서 자기 손을 꼭 잡고 있는 제 모습을 좋아하셨어요, 어린아이는 응당 그래야 한다면서요. 무서우면 어른의 품으로 파고들라고 하셨죠. 그래서 전 고등학교에 들어간 이후로 더 이상 괴담이 무섭지 않게 됐지만, 그래도 가끔 무서운 척을 하며 할머니를 즐겁게 해 드리곤 했죠. [아케치 히데키]하지만 할머니가 떠나신 뒤론, 이렇게나 오랫동안 저와 이야기를 나눠 준 사람은 없었어요. 와 주셔서 고마워요. 잘 생각해 보니 PLAYER 씨를 만난 이 기간 동안엔, 제가 평생 동안 하지 않았을 법한 행동을 꽤 많이 했네요. [아케치 히데키]하지만 괜찮아요, 심지어 뭔가 기대도 되네요. 방금 PLAYER 씨께서 망설임 없이 제게 다가와 주신 것처럼, 저도 갑작스레 깨달았어요…… 저는 PLAYER 씨의 모습을 더 많이 보고 싶어요, 그리고 PLAYER 씨에게도, 더 많은 아케치 히데키를 보여 주고 싶어요. 이어서 히데키가 나의 손을 잡으며 눈을 마주쳐 왔다. [아케치 히데키]만약 괜찮다면, 저도 PLAYER 씨가 의지해 주는 대상이 되고 싶습니다. [player]난…… [아케치 히데키]바로 대답해 주지 않으셔도 좋아요, 전 단지 제 생각을 알려드린 것 뿐이니, 부담을 갖지는 말아 주세요. 활짝 핀 꽃잎이 살랑이며, 평온한 정원에 산뜻한 바람이 불어와 포도 덩굴이 사락거렸다. 날 대신하여 대답을 하려는 것일까. 히데키는 다시 눈동자를 빛내며 나에게 초대 의사를 보냈다. [아케치 히데키]이 냄새는…… 혹시, 회화 과자 좀 드셔 보시겠어요? [player]아하, 히데키도 화제를 돌리는 경우가 있네. 그래서…… 회화 과자가 뭐야? [아케치 히데키]쉽게 말하자면, 그냥 꽃을 이용해 만든 간식 같은 거예요. [아케치 히데키]옛말에 “문 앞에 회화나무를 심으면 금전운이 들어온다”라는 속설이 있죠. 옛 마을의 거의 모든 집들은 회화나무를 심어 두었어요, 그리고 여름이 되면 정원에 꽃향기가 퍼지죠. 어르신들은 회화를 따서 간식을 만들고, 아이들은 회화 꽃잎을 따서 그냥 먹기도 해요. [player]네 할머니 같은 분이라면 분명 풍습을 따를 것 같은데, 그럼 분명 이 집에도 회화나무가 심어져 있겠지? [아케치 히데키]네, 뒤뜰에 한 그루 심어져 있어요. 가서 보시겠어요? [player]당연하지, 회화 향기를 한번 제대로 맡아보고 싶은걸. [아케치 히데키]많이 따 놓을게요, 하지만 꼭 씻어서 드셔야 해요. [player]알겠어! 히데키는 고집스럽게도 회화 꽃을 따는 일을 홀로 도맡았고, 여유가 생긴 나는 아케치 집안의 모든 역사를 지켜본 이 회화나무를 유심히 살폈다. 확실히…… 아주 큰 회화나무다. 내 생각엔 두 사람을 동원해도 이 나무 기둥을 감싸지 못할 것만 같았다. 가까이 다가가니 내 몸에 회화향이 스며드는 느낌이다. [player]응? 여기 뭔가 그림이 그려져 있네? 나무에는 익숙한 마크가 그려져 있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이것은 수 년 전 유행했던 만화 속 남녀 주인공이 계약을 맺을 때 나타나던 마법 문양이었다. 손가락으로 계산해가며 그 만화가 나왔던 시기를 되짚어 보니, 아무래도 이 나무에 이런 문양을 그려 넣을 사람은 히데키밖에 없을 것 같았다. [아케치 히데키]정말 제대로 관찰하셨네요, 저도 잊어 버린 일인데 말이죠. 이건 제가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에 새겨 넣은 문양인데, 묻어 둔 비밀을 기록하기 위해서 새겼었죠. [player]만화처럼 편지를 써서 묻어 둔 다음, 성인이 되면 꺼내서 짝사랑에게 전달하는 내용인가? 비밀이 제대로 전달되는 경우는 거의 드문데, 이건 짝사랑에 빠진 세컨 주인공의 전개야. [아케치 히데키]자신에게 줄 편지를 묻어 두는 방식은 확실히 만화에서 영감을 얻었지만, 이건 짝사랑과는 관계없어요. 생각해 보니…… 이걸 묻어 둔지도 이제 거의 십 년이 지났네요. [player]축하합니다, 십 년이 만기되었습니다! 이제 스토리를 이어나갈 때가 왔군요. [아케치 히데키]하하, 그러네요. 그럼 바로 행동으로 옮겨 보죠. 히데키의 행동력에 힘입어 함께 나무 표식 바로 아래를 수직으로 파내려 가자, 금세 약간 녹슨 듯한 철재 케이스가 나타났다. 히데키는 손으로 철재 케이스의 흙을 털어내더니 모서리를 계속 만지작거렸는데, 무언가 망설이는 모양새였다. [player]잠시 자리를 피해 줄까? [아케치 히데키]아니에요, 저는 제 모든 것을 PLAYER 씨와 함께 나누고 싶어요. 단지 이 편지는…… 제가 열 살 때였죠, 아버지와 크게 싸우고 나서 감정이 격해졌을 때 쓴 편지라서, 상당히 부정적이고 충동적인 생각이 포함되어 있을 거예요. [아케치 히데키]지금 생각해 보면 별거 아닌 것들이었지만, 열 살의 아케치 히데키에게는 하늘이 무너져 내릴 듯한 스트레스였었죠. 히데키는 항상 '만능'인 이미지였고, 그동안 연약한 감정은 거의 표출하지 않았었다. 나는 한발 다가가 그와 마주섰다. [player]이 편지의 내용이 무엇이든, 이제는 바뀔 수 없는 과거야. 하지만 중요한 건 현재와 미래잖아. [player]'과거에서 교훈을 얻으라', 그런 말도 있잖아. 지금 네 손에 쥐고 있는 편지를 보면, 너도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될지도 몰라. [player]내가 알고 있는 히데키는, 절대 문제를 피하는 사람이 아니야. 짹짹…… 참새들이 지저귀며 이 이야기의 결말을 알리고 있었다. 히데키의 눈은 유난히 빛나 보였고, 그는 조심스럽게 수 년간 봉인되어 있던 케이스를 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겨 있던 것은, 예상과는 달리 그가 어릴 적 분노에 차 써 내려갔던 편지가 아니었다. [player]“나의 손자 히데키, 글로써 만나는구나. 이 편지를 보거든 부디 기분 나빠하지 않길 바란다.”……? [아케치 히데키]이건…… 할머니가 내게 남기신 친필서? “밤중에 깨어나 뜻밖에 너의 비밀을 발견해 버렸구나. 네 허락 없이 편지를 바꿔치기해 버린 것에 대해, 이후에 네가 이것을 열어 볼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미안하구나.” “히데키, 넌 지금 중학생이니? 아니면 고등학생? 설마 대학생이라거나, 이미 사회인이 된 걸까? 좋아하는 사람은 있고? 아직 혼자 지내니?” “호호, 부끄러워 말거라. 할머니는 비웃지 않을 거야. 사실 이 위에 적힌 내용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단다, 할머니가 가장 묻고 싶은 건, 바로 지금 네가 즐겁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서란다.” “즐거움. 그래, 바로 이 단어야. 일반적인 사람이든 히데키 가의 후계자든, 네가 어떤 일을 하든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은 바로 다름 아닌 즐거움이란다.” “할머니는 네가 이 편지를 열어 보았을 때, 그저 즐겁고 행복한 상태였으면 좋겠구나. 내가 바라는 건 그게 전부란다. ―널 영원히 사랑하는 할머니가” 이 편지는 할머니의 염원을 모두 담고 있었지만, 내용은 상당히 간결했다. 부드럽고 간결한 글귀를 통해, 한밤중 책상에 앉아 손자를 걱정하는 할머니의 모습이 느껴졌다. [아케치 히데키]제 어린 시절, 아버지께서는 제가 정치가가 되어 아케치 가의 미래를 짊어져야 한다고 교육하셨어요. 때문에 저를 우수한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 수많은 숙제를 내 주셨고, 저는 거의 대부분 시간을 그것에 쏟아부을 수밖에 없었죠. [아케치 히데키]하지만 결국 전 완벽한 기계가 아니었던 거예요. 아버지가 압박할수록, 저는 더욱 거세게 반항했었거든요…… [아케치 히데키]학생회장이든 마작부 부장이든, 사실 마음속으론 그것들과 관련된 일들을 배척하고 있었어요. 왠지 제가 잘하면 잘할수록, 결국 아버지의 방침이나 교육이 성공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player]하지만 그런 일들이 너한테 딱인 거 아니었어? [아케치 히데키]맞아요, 하지만 속으로는 그런 기쁨들을 외면해 왔었죠. 그런 일들을 처리할 때면 사실 기쁨이 먼저 차올랐어요, 심지어 여유롭기까지 했죠. [아케치 히데키]지금까지는 다른 사람에게 그걸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어요, 특히 아버지에게는요. 하지만, 이젠 그것도 중요하지 않게 되었네요. 히데키는 할머니의 편지를 다시 접어 품속에 집어넣었다. [아케치 히데키]이 편지로 인해 알게 되었습니다, 저도 언제나 사랑 받는 존재였다는 사실을요. 저, 히데키의 인생은 제 자신만의 것입니다. 아버지의 소유물도 아니고, 할머니의 소망에 의한 것 또한 아니겠죠. [아케치 히데키]타인의 관점 때문에 저의 삶이 좌지우지되어선 안 되는 거였어요, 제 인생은 분명 저만의 것일 테니까요. 만약 지금 할머니의 질문에 답할 수 있다면, 아마…… 즐겁다고 했을 거예요.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즐거운 삶을 선택할 거라고 답했겠죠. [player]할머니가 들었다면 기뻐하셨겠는걸. [아케치 히데키]고마워요…… 만약 제가 PLAYER 씨를 이곳에 데려왔다는 사실을 알면, 할머니도 기뻐하셨을 거예요. 왜냐면 그건 할머니의 또 다른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되었을 테니까요. [player]……에?! 해님이 분위기를 파악했는지 구름 뒤로 숨어 버리며, 지금 이 순간을 위해 딱 알맞은 분위기를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히데키가 내 옆으로 와 고개를 들고는, 내 머리 위에 앉은 꽃잎을 따갔다. [아케치 히데키]앞으로도, PLAYER 씨를 이곳에 자주 초대해도 될까요? [player]그래…… 어르신을 실망시키면 안 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