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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 오후, 이 동네에는 바깥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평일 오후, 이 동네에는 바깥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아직 퇴근 때가 되지 않아서 인지 단지는 더욱 조용했다. 이런 고요한 분위기 속 도착을 알리는 엘리베이터의 소리는 유난히 크게 울려 퍼졌다.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엘리베이터를 빠져나와 카나의 집 현관문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곤 가방의 속주머니까지 하나하나 열어보며 소지품을 체크해보기 시작했다. [player]감자칩 없고, 사탕 없고, 캔 음료 없고…… 후…… 이상 없군. 축 처진 가방, 진지한 표정, 이상한 혼잣말…… 이런 이상해 보이는 행동은 모두 오늘 내가 카나를 찾아온 이유와 관련이 있었다. 이야기는 일주일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길가에 매미 울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매미는 생명으로 한여름의 무더위를 노래하며, 도시의 소음 속에서도 강한 존재감을 뽐내었다. 평소 시끌벅적했던 상점가는 기온이 올라갈수록 손님이 점점 줄어들었다. 길가의 사람들은 모두 재빠르게 움직이고 있었으며, 가끔 보이는 손님들도 그저 에어컨이 틀어진 시원한 가게에서 천천히 구경할 뿐이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긴 줄이 늘어서 있는 길모퉁이의 밀크티 카페는 더욱 특별해 보였다. 사람들은 내리쬐는 태양을 견뎌서라도 소문난 시그니처 아이스 밀크티를 마시고자 했다. 구경거리에 사람이 몰리는 것은 본능이다. 나는 마음속의 자신과 치열한 사투를 수차례 치렀지만, 결국 호기심에게 패배하여 그 줄의 끝자락에 서게 됐다. [? ? ?]PLAYER, 맞나요? 줄을 선 지 얼마 안 됐을 무렵, 익숙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거대한 양산을 손에 들고 머리에 선글라스를 걸친채 구부러진 수염을 붙이고 있는 소녀가 보였다. 하지만 트레이드 마크인 분홍색 머리를 보고는 그녀가 누구인지 아주 쉽게 알 수 있었다. 동시에 그 괴상한 차림 덕분에 웃음도 함께 터져 나왔다. [player]카나, 그 차림은…… 하하하, 스타일리스트한테 무슨 잘못이라도 했어? 후지타 카나 [후지타 카나]쉿… 목소리가 너무 커…! 그런 거 아냐, 스타일리스트 언니는 카나를 좋아하는걸. [player]그럼 뭐때문에 이런 차림을 하고 있는 거야? [후지타 카나]흠흠. 잘나가는 인기 아이돌이 외출할 때 정체를 숨기는 건 당연한 거지. 그것보다, 우리 차례가 오려면 아직 20분 정도는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은데, 이쪽으로 와서 카나랑 같이 양산이라도 같이 쓰는 건 어때? 카나는 그렇게 선글라스를 벗곤 날 향해 윙크를 날렸다. 옷차림만 빼고 보면 더 완벽한 그림이었을텐데. 카나가 애써 화제를 돌리려는 것이 느껴졌다. 이런 차림을 하는 건 역시, 아이돌에게 있어선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난 카나의 뜻대로 그녀의 옆에 섰고, 양산이 만들어준 그림자가 우리 두 사람을 가둬 두었다. 은은한 향기가 코끝을 감싸돈다. 소녀에게서 흩날리는 상쾌한 향이었다. [player]이 시간엔 원래 댄스 수업이 있지 않아? 며칠 전엔 그 댄스 수업 때문에 오후에 시간이 없다면서 하소연 했던 것 같은데. [후지타 카나]우선 말해 둘 건, 카나는 땡땡이를 친 게 아냐. 어떤 불가피한 사정 때문에 매니저 언니가 임시로 댄스 수업을 다른 수업으로 변경했는데, 장소가 바로 이 밀크티 가게 근처라서, 휴식 시간동안 잠깐 밀크티를 사러 나왔을 뿐이라고. [player]불가피한…… 사정? [후지타 카나]흠흠, 아직은 비밀 단계인걸.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니까, 미리 소식을 좀 흘려줄게. 카나는 이제 곧 이한시에서…… 앗, 들켰다! 방금 전만 해도 덤덤했던 소녀는 순간 어떤 공포와 마주치기라도 한 듯, 당황하며 한걸음 물러섰다. 마치 자신을 완전히 감추려는 듯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멀지 않은 곳에 서른 정도 되어 보이는 여성이 서 있었다. 그녀는 부릅 뜬 눈으로 카나를 바라보며 우릴 향해 험악하게 다가왔다. 상대방은 어딘가 낯이 익었지만, 그녀가 누구인지 당장에 떠오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카나의 직업과 온라인에서 본 안티팬들의 행태를 떠올리곤, 저 사람이 혹시라도 과격한 행동을 하지는 않을지 걱정이 되었다. 그렇게 난 본능적으로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몸으로 그녀와 카나 사이를 가로막았다. [player]당신은…… [? ? ?]이리와! [player]……? 어리둥절하는 사이, 뒤에 있던 카나가 한발자국 앞으로 나왔다. 카나는 기가 죽은 듯이 고개를 숙인 채 상대를 따라 인적이 드문 옆길로 들어섰다. 그리고 나와 어깨를 스치던 순간, 카나는 상대가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날 향해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의 착각이었을지는 모르지만, 카나는 마치 선생님에게 숙제를 안한 걸 걸려 버린 초등학생의 모습과 같아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궁금한 걸 물어볼 타이밍이 아니었다. 난 카나에 대한 걱정으로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두 사람의 뒤를 쫓아갔다. 여자는 주위를 살핀 후,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자 검지를 내밀곤 카나의 이마를 가리켰다. [? ? ?]후! 지! 타! 카나! 감히 밀크티를 사러 가!!! [후지타 카나]으음, 만일 제가 그냥 친구를 만나서 얘기를 좀 나누려고 했을 뿐이라고 한다면…… 믿어 주실 수 있을까요? [? ? ?]……하하! [후지타 카나]보아하니…… 안 믿는 눈치로군요. 다행히 우려했던 위험한 상황은 펼쳐지지 않았다. 두 사람의 대화로 미루어 보아, 아무래도 그녀들은 단순히 아는 사이를 넘어 매우 가까운 사이 같았다. 순간 불현듯 눈앞의 여성이 누구인지 알아챌 수 있었다. [player]당신은 샘 그룹 엔터테인먼트 소속의 퀸메이커, W.I.N의 매니저! [후지타 카나]빙고, 정답이야. 매니저 언니, 제가 소개해 드릴게요. 이쪽은 제 친구이자 열성 팬인 PLAYER입니다. [매니저]그분이셨군요. 얘기 많이 들었어요, PLAYER. 반가워요. [player]절 아시나요? [매니저]당연하죠. 카나가 자주 얘기해요. 그래서 이 아이가 그쪽과 함께 있을 때 즐거워한다는 것도 알 수 있었죠. 마작을 아주 잘하신다고 들었는데, 기회가 되면 한번 겨뤄 봐요. [player]하하, 좋죠. 방금 전엔 매니저님을 카나의 안티로 오해해서 카나를 데리고 도망이라도 갈 뻔했네요. [매니저]저도 이렇게 거칠어지고 싶지는 않았는데, 어떤 조그만 아이돌 하나가 다이어트 기간에 자꾸 몰래 밀크티를 마시러 도망을 나가는지라. [player]……다이어트? [매니저]네, W.I.N은 삼 개월 후에 이한시에서 콘서트를 할 예정이에요. 회사에서는 이미 준비에 들어갔고요. [매니저]카나는 살이 쉽게 찌는 타입이라, 이미지 관리를 위해서 콘서트 전에 다이어트를 시키고 있어요. 그래서 이 기간 동안 밀크티 같은 디저트류는 철저히 금지거든요. [후지타 카나]아아, 매니저 언니. PLAYER한테 서프라이즈로 말해 주려고 했었는데, 그렇게 밝혀 버리면…… 매니저는 손사래를 치며 옆에 있던 카나의 항의를 무시했다. [player]전혀 몰랐던 소식인데, 제가 팬들 중에 첫 번째로 알게 된 건가요?! [매니저]콘서트 준비가 완료되면 정식으로 발표할 거라, 아직은 비밀로 부탁드려요. [player]문제없습니다. 지금부터 티켓팅 연습을 해야겠네요. 꼭 티켓팅에 성공해서 공연 보러 갈 거예요. [매니저]하하, 카나의 다이어트도 그쪽처럼 이렇게 열정적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소속사에서 헬스 트레이너까지 고용해서 다이어트를 돕고 있는데, 카나는 제가 조금만 한눈팔아도 게으름을 피워대니 참. [매니저]다음 주엔 그룹의 다른 멤버들을 데리고 옆 도시에 가서 공연을 해야 하는데, 그동안 카나의 감시역을 누구한테 맡길지 고민이에요. [후지타 카나]흠흠, 매니저 언니. 저에게 어설프지만 아이디어가 있습니다! [매니저]오? 말해 봐. [후지타 카나]등잔 밑이 어둡다고 하잖아요, PLAYER한테 제 감독을 맡기는 거예요. [player]에…… 나? [후지타 카나]맞아. 카나의 친구니까 집에 와서 감독해 줄 수도 있고, 이번 일에 대한 비밀도 보장되니까 다이어트 계획도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어. 이 일에 아주 딱 맞는 적임자인걸. 갑자기 지목당한 나는 당황스럽다는 얼굴로 매니저를 바라봤지만, 그녀는 턱을 어루만지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무래도 이 일에 대한 가능성을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매니저]괜찮은 생각인데. PLAYER 씨, 도와주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