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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곡히 거절

좋아하는 아이돌과 장시간 함께할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지만, 그 아이돌의 애교를 버텨내며 '도움'을 준다는 것 역시 불가능한 난관에 가깝다. 그래서 난 깊은 고민 끝에 이 일을 거절하기로 했다. [player]죄송하지만, 저는…… [후지타 카나]흠흠, 크흠흠! 난 거절의 의사를 밝히려 했지만, 카나의 기침 소리로 인해 흐름이 끊겨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소녀는 과장된 걸음으로 내 곁으로 다가와 소곤거리며 협상을 하기 시작했다. [후지타 카나]PLAYER, 최근에 듣자 하니 잭스가 널 숲에 데려가서 수련할 계획이라던데, 내 생각엔 이 한창 더운 날씨에 '생존훈련'을 하는 것보단, 이한시에서 나랑 같이 있는 게 더 좋을 거라고 생각되는데? [player]크흠, 어떻게 안 거야? [후지타 카나]8G 속도로 인터넷 서핑을 하는 소녀의 정보 수집 능력을 얕보지 말라구. 어때? 그럼 매니저 언니한테 들려줄 대답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게…… [player]푸훗, 이게 협박인가? [후지타 카나]흐흥, 뭐가 더 필요한가 보네? PLAYER, 욕심이 너무 커. 그래…… 좋아, 날 돕는다면 카나가 콘서트 티켓을 줄게! [player]콘서트 티켓 따윈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지금 제 마음이 뜨거워지고 있다는 것이죠. 타인의 곤경을 두고 볼 수는 없어요! ……매니저님, 이 일은 부디 제게 맡겨 주시죠. 매니저의 눈빛은 나와 카나의 사이를 몇 번씩 오갔고, 결국 우리 둘의 비밀을 알아챈 듯했다. [후지타 카나]우움, 매니저 언니…… [매니저]카나가 이렇게까지 말하니, 좋아요…… 그럼 이 일을 좀 부탁드릴게요. 여기까지의 스토리가 바로 내가 평일임에도 카나의 집에 방문하게 된 이유다. 그리고 가방을 자세히 검사한 이유는, 요 며칠간 그녀의 다이어트를 감시하며 그녀와 치열한 '수 싸움'을 벌인 끝에 얻어 낸 경험 때문이었다. 나는 고칼로리 식품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카나의 집 현관문을 살살 두드렸다. [후지타 카나]갑니다 가요~ PLAYER, 어서와! 문 저편에서 카나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그리고 곧바로 우당탕탕 하는 소리가 이어지는 걸 봐서는, 아마 꽤 많은 물건들과 부딪힌 모양이다. 하지만 다행히 금세 문이 열리며 얼굴에 미소를 띤 카나의 얼굴이 드러났다. 나의 시선은 소녀의 이마로 향했다. 몽글하게 맺힌 땀방울이 하얗고 여린 얼굴선을 따라 밑으로 흘러내리며 바닥에 젖은 흔적을 만들었다. 나는 그 풋풋하고 귀여운 모습에, 앞으로 다가가 땀을 닦아주고 싶어졌다. 무대 위에서의 완벽한 모습과 달리, 사적인 공간에서의 카나는 말괄량이 소녀와 같은 인상이 더해져 있었다. [player]좋음 점심이야, 카나. 벌써 운동 중이야? 칼로리는 얼마나 태웠어? 제대로 기록은 해 뒀어? [후지타 카나]으음, 내 노력을 먼저 칭찬해줘야지! PLAYER, 네가 이렇게 엄격할 줄 알았다면 매니저 언니한테 널 추천하진 않았을 텐데 말이야.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느낌이야…… [player]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없어, 매니저님한테 이미 2.5kg은 빼 주기로 장담했다고. 게다가 성공하면 티켓을 VIP석으로 업그레이드시켜 준다고 하셨고. [후지타 카나]그건 매니저 언니한테 부탁할 필요 없어, 나도 해 줄 수 있는걸. 소녀는 눈을 찡긋하며 내게 윙크를 보냈다. 하지만 왠지…… 이런 귀여운 모습은 평소처럼 의심 없이 마냥 예쁘게만 볼 수 없었다. 오히려 내게 경계심을 품게 했다. [후지타 카나]봐봐, 이제 곧 점심시간이야. 나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는데, 점심 메뉴는 조금 변화를 줘도 괜찮지 않을까? 어제는 몰래 탄산음료를 마시고, 그 전날은 몰래 초코 비스킷을 먹고, 그 전전날은 몰래 라면을 사러 갔던 카나를 곱씹어 보며, 난 한 치의 예상을 빗나가지 않는 그녀의 말에 '역시'라며 감탄했다. [player]예를 들면…… 야채 샐러드를 건물 1층에 있는 허니 치킨으로 바꾼다던가? [후지타 카나]역시 우린 게임에서만 마음이 통하는 게 아니라, 음식 취향까지 통하는 모양이야. 하하, 난 이미 생각을 다 해놨지. 패밀리 치킨에 바삭한 텐더를 추가하면 엄청 가성비 좋은 세트가 완성된다구. [player]좋은 생각이야, 하지만 내가 준비한 점심은 이거거든. [player]에? [player]매니저님이 떠나기 전에 이미 네 일주일 식단을 정해 주셨어. 어디 보자, 오늘은…… 이거다, 망고 쉬림프 샐러드 세트. 한껏 들떠 점심 메뉴에 대해 떠들던 카나는 이 얘기를 듣자 바로 항의를 표시했다. 그리고 이내 불쌍한 표정을 짓더니 나의 소매를 붙잡곤 없는 눈물을 닦는 시늉을 보였다. 곧바로 성냥팔이 소녀 모드에 돌입한 카나였다. [후지타 카나]흑흑, 2주라고. 내가 2주 동안 어떻게 지내 왔는지 알아? 매일 샐러드만, 종류만 바꾸면서 계속 먹어 왔어. 온몸에서 참깨 드레싱 냄새가 날 정도야. [후지타 카나]오후엔 4시간짜리 헬스 수업도 있고…… 그저 고기로 단백질 좀 보충하려는 것뿐인데, 이것조차 용납 안 되는 거냐구…… [player]듣다 보니 꽤 합리적인 요구 같기도 하고…… [후지타 카나]헤헤, 역시 카나를 가장 아껴 주는 사람은 너였어. 그럼 우리 이제 치킨을 시켜 볼까나? 아무래도 애교를 부리는 카나의 부탁을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은 결코 없을 것이다. 결국 정신을 차렸을 땐, 감정이 이성에 한발 앞서서 그녀의 부탁을 들어 주기 일보 직전이었다. 소녀는 기뻐하며 휴대폰을 들고선 또다시 자신이 구성한 세트 메뉴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잠시 뒤…… 그녀가 주문 확인 버튼을 누르기 바로 직전, 책임감이 나의 이성을 다시 되찾아왔다. [player]응? 하지만 카나의 믿음, 기쁨, 그리고 약간의 우려가 섞인 눈빛 공세에, 나의 마음속에선 “악마”와 “천사”의 대치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