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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잔을 사자

은은한 꿀향이 섞인 차의 향기가 나의 후각을 자극했고, 나는 망설임 없이 두 개의 손가락을 세우며 점원에게 두 잔을 주문했다. [아케치 히데키]PLAYER씨도 '두 번째 잔 반값' 같은 영업 수단에 넘어가실 줄은 몰랐군요, 미리 알았다면 당신에 대한 영입 전략을 바꿨을 텐데. [player]꼭 그런 건 아니야. 밖에서 너무 오래 있었잖아, 몸이 다 얼어붙겠어, 따뜻한 음료로 몸을 좀 녹일 필요가 있지. [아케치 히데키]……죄송합니다, 그 점을 고려하지 못했네요. 외투를 하나 더 걸치면 괜찮아지실까요? [player]아니야, 따뜻한 음료면 충분하니까, 외투는 네가 계속 입고 있어. 나는 손사래를 치며 제안을 거절했고, 점원이 건네주는 봉투를 히데키 대신 받아 들었다. [player]응? 잠깐, 난 두 잔만 주문했을 텐데…… [점원]옆 분께서 따로 요청하신 게 있어서……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히데키를 바라보았다. 히데키는 음료가 담긴 봉투를 건네받곤, 다른 두 잔을 꺼내 들었다. [아케치 히데키]이 두 잔은 따듯한 물입니다, 이걸로 손을 좀 녹이세요. 역시 음료는 제대로 음미하는 편이 좋겠죠, 점원들이 힘들게 만들었으니까요. 그의 목소리에는 듣는 사람이 수긍할 수밖에 없는 마력이 있었다. 점원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은 그가 이미 '아케치 히데키'라는 소용돌이에 빠져 버렸다는 사실을 숨김없이 알게 해 주었다. [아케치 히데키]가시죠, 공연이 곧 시작됩니다, 표 검사도 해야 돼요. 홀에 들어서자, 나는 놀라는 동시에 '이한시 최대 규모'의 극장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다는 것을 느꼈다. 안과 밖의 경계가 또렷하지 않은 공연장은, 금색과 빨간색의 조합과 아름다운 도금 조각상들이 완벽히 어우려져 있었다. 넓게 통일된 컬러 블록의 영향인지, 여기 있는 나 자신이 작아졌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player]오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공연장이 만석이라니, 몸에 전율이 흐를 정도인걸. [아케치 히데키]음악이란 언어 없이도 소통을 가능케 하는 수단이죠. 배우가 전달하는 감정을 한순간에 체감할 수 있는 느낌 역시 오페라 관객이 많은 이유일 거예요. [아케치 히데키]게다가 이건 유명한 배우들까지 나오는 오페라인 만큼, 어쩌면 당연한 일이죠. [player]음…… 표가 꽤 비쌌을 텐데, 큰 돈을 쓰게 한 것 같아 마음이 무겁네. [아케치 히데키]PLAYER씨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으니 전혀 아깝지 않습니다, 의미 있는 지출이에요. 게다가 저도 오늘 PLAYER씨에게 새 '지식'을 배웠는걸요. [player]엥?! 히데키가 손에 들린 잔을 가볍게 흔들자, 안에 있던 액체가 찰랑이며 맑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케치 히데키]맛이 궁금해서 PLAYER씨와 같은 맛으로 샀는데, 생각보다 맛있는걸요…… 뭐랄까, 평소 마시던 밀크티보다 로맨틱한 향이 남는달까. 대화하는 사이 관객의 입장이 모두 끝났고, 극장 내에 종이 세 번 울리며, 공연이 이제 곧 시작된다는 신호를 알렸다. 나는 히데키에게 조용히 하자는 손짓을 한 뒤 옷깃을 여미고 공연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배우 A]나간다고, 초인종 좀 그만 눌러, 그게…… 엇, 죄송합니다 룸메이트가 온 줄 알았네요. 누굴 찾아오셨나요? [배우 B]혹시 이곳이 김 선생님 집인가요? 어제 연락드렸는데요. [배우 A]잘못 찾아오신 듯합니다, 선생님. 김 선생님 댁은 옆집이에요, 그 집 래브라도는 사나우니, 지나가실 때 조심하세요. [배우 B]당신이 문을 열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분명 제가 잘못 찾아왔던 것이 맞았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문을 연 순간, 저는 이것이 하늘의 뜻이었음을 깨달았지요. 아름다운 아가씨, 저는 올해 스물넷입니다, 부모님께선 건강하시고, 집안도 나쁘지 않습니다, 저도 준비 중인…… [배우 A]저기, 잠시만요……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배우 B]당신이 문을 연 순간, 저는 첫눈에 당신께 반해 버렸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연극은 10대 오페라 중 하나로 꼽히는 <살구 꽃 이슬비>였다, 평범한 집안의 여인이 귀공자와 만나 신분의 제약과 세간의 손가락질을 뒤로하고 사랑에 빠지는 내용이다. 그러나 귀공자의 아버지는 신분에 걸맞은 상대를 맞아야 한다며 이별을 강요하고, 그렇게 헤어진 두 남녀는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맞이한다. 무대 위, 귀공자 역의 남자 배우는 낭만적이면서도 방탕한 도련님을 재미있게 연기하며 객석의 관객들로부터 웃음을 끌어냈다. 공연용 제설기가 만들어 낸 화려한 눈꽃 아래, 그가 손에 장미를 든 채 한쪽 무릎을 꿇고 관중을 향해 운을 떼니, 공연장은 일순간 그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찼다. 이는 냉혈한의 마음마저도 움직일 법했다. 그러나…… 나는 그 배우에게 뭔가 아쉬운 부분이 있다는 생각을 하며 나도 모르게 옆으로 눈을 돌렸다. 옆에 앉은 히데키는 시종일관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히데키는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을 뿐이었지만, 신기할 정도로 기품이 넘쳐흘렀다. 난 이것이 진정한 귀공자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아케치 히데키]? 그가 나로부터 느낀 시선에 할 말이 있는지 물어 왔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는 표시를 하곤, 다시금 무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거운 분위기의 교향곡이 시작되고, 귀공자의 아버지가 아들의 사랑에 대해 눈치챈다. 그에게는 아들의 행위가 가족에 대한 배신과도 같았기에, 그는 '방황하고 있는' 아들이 '정상'으로 돌아오길 바라며. 아들의 외출을 금하고 명문가의 규수와 교제하도록 강요했다. 이렇게 한 쌍의 연인이 강제로 헤어지게 되고, 젊은 귀공자는 아버지의 뜻에 따르는 척을 하며 사랑하는 여자를 지키려 했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 자는 이성을 잃기 마련이라 했던가, 그는 아버지가 자신의 생일 연회에서 약혼 발표를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되는데…… [배우 B]아름다운 숙녀 여러분, 아름다운 꽃과 황금, 그리고 달콤한 미소. 모든 것이 사람을 즐겁게 만들죠. 이제 중요한 소식을 하나 발표하려 합니다. 네, 바로 지금 저의 생일 파티에서 말입니다. [배우 C]죄송합니다 여러분, 제 어리석은 아들이 실례를 범했군요, 지금 바로 아들놈을 방으로 돌려보내겠습니다…… 잘 듣거라, 지금은 네가 고집부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만약 네가 가문 계승자로서의 양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당장 입을 다물고 위층에 올라가 있거라. 그러면 방금 전 일은 없던 걸로 해주마. [배우 B]아니요, 아버지, 제 마음은 바뀌지 않습니다. [배우 C]닥치거라! [배우 B]아버지가 지팡이로 제 등을 내려치신다 해도, 저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저를 방에 가둬 두신다 해도, 저는 매일 크게 소리칠 것입니다. 제 혀를 뽑아버리신다 한들, 제겐 여전히 의지를 표할 펜과 종이가 있습니다. [배우 B]저는…… 신문사의 젊은 편집자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녀는 삶에 충실한 사람이며, 자유와 낭만을 바라보고 있죠. 그녀의 웃음은 햇빛마저 물러서게 합니다. 나는 기꺼이 그녀의 석류빛 치마 아래 고개를 숙이고, 온 마음을 담아 그녀의 안부를 물을 것입니다. [배우 B]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그녀가 절 사랑하듯 저도 오직 그녀만을 사랑할 것입니다. 저는 그녀를 아내로 맞이할 것입니다. 그녀의 성을 저의 성으로 바꿔줄 것입니다. [배우 C]닥쳐라, 이런 불효 자식, 네가 정녕 미쳐버린 것이냐! [배우 B]아버지, 저는 그저 누군가를 사랑할 뿐입니다, 이건 위법 행위가 아닙니다. 저는 그녀에게 제 전부를 주고 싶을 뿐입니다…… [배우 C]네 녀석이 지금의 신분과 지위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 네 모든 것은 가문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다. 보아하니 내가 널 너무 오냐오냐하며 키워서 이 아비를 업신여기고 있는 모양이구나? 집안의 최고 결정권자를 화나게 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었는지 보여줄 테니, 그때도 지금같은 순진한 생각을 지킬 수 있길 기대하마…… 여봐라, 이 놈을 끌고 가라! 고생이 뭔지 가르쳐줘야겠다! 순탄한 삶을 살던 젊은이로서는 그의 가장 큰 적이 자신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열변을 토하며 아버지를 설득하려 했지만, 결국 어두운 지하실에 갇히고 말았다. 날이 갈수록 그의 정신과 육체는 죽어가고 있었다. 자유로이 살아가던 이가 고통 당하며 삶의 의욕을 잃어가는 모습, 그것이 그저 대본일 뿐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왜인지 내 마음속에 절실히 와닿았다. 모든 것을 빼앗긴 귀공자는 깊은 숨을 들이쉬며, 달빛에게 애인에 대한 그리움을 토해 놓는다. 나는 그것이 얼마나 애절하고 감동적인 노래인지 느낄 수 있었고, 나와 관객 모두가 함께 노래가 이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배우 B]내 사랑하는 이여, 난 기꺼이 내 생명을 바쳐…… 엇?! 남자배우가 이제 막 노래의 첫 마디를 부르기 시작할 무렵, 돌연 깜짝 놀라는 비명소리가 들리며 무대가 깊은 어둠에 휩싸였다. [player]……? 극장이 마치 심연 속에 빠진 것마냥 어둠에 잠겼다. 노랫소리가 갑자기 끊긴 걸 보면, 무대에 무슨 사고가 난 모양이다. [아케치 히데키]PLAYER씨, 괜찮으신가요? [player]난 괜찮아. 음, 이건…… 연극의 일부인가? [아케치 히데키]안타깝게도 그건 아닐 겁니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어쨌든…… 정전이네요. 흠, 역시 연극을 보러 오지 말걸 그랬어요. [player]그게 무슨 말이야? [아케치 히데키]사실 여기 오기 전까지 고민했거든요…… 세계적으로 유명한 오페라는 대개 비극이 많아서, 저는 그게 좀 불길하다는 생각을 하곤 했거든요. [player]에?! 나는 널 철저한 현실주의자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걸 신경 쓰는 거야? [아케치 히데키]저는 매년 여름 방학마다 시골에 있는 할머니 댁에 가요. 할머니는 신앙이 있으셨지만 제게 강요하시진 않으셨고, 보통 할머니 혼자 집에 모셔진 불단을 모셨죠. 이제서야 깨달은 거지만, 저도 생각보다 그 영향을 많이 받은 모양이에요. [player]신성한 곳에서는 불경한 말을 쓰거나 쉽게 이별을 고하지 않는… 그런 건가? 아, 이건 그냥 예시일 뿐이야. [아케치 히데키]네…… 그렇게 생각해도 좋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게 사실이잖아요, 비극적인 오페라를 보다가 극장이 정전돼 버리는 사태. 이 극장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런 사고가 없었거든요. 모처럼 PLAYER씨를 초대했는데…… 히데키의 목소리에서 큰 아쉬움이 느껴졌다, 히데키는 이번 만남을 정말로 신경 쓰는 듯 보였다. 나는 한 발자국 앞조차 보이지 않는 공연장을 보며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랐다. 히데키의 직감이 들어맞은 걸 칭찬해야 하는 건가… [극장 스태프A]관객 여러분, 극장에 정전이 발생했습니다. 15분 이내로 복구 완료될 예정이니, 당황하지 마시고 자리에서 기다려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관람에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정전으로 인해 안내 방송을 할 수 없게 되자, 극장 관리자가 확성기를 통해 상황을 알리며 관객을 안심시켰다. 공연 도중 발생한 갑작스러운 정전으로 관객들은 당혹스러움과 불만을 감추지 못했지만, 다행히 큰 혼란으로 번지지는 않았다. 안내를 하고 있는 관리자 외에도 손전등을 든 스태프들이 좌석 사이를 돌아다니며 질서를 정리하고 있었다. 스태프들의 손전등 덕분에 더 이상 극장은 캄캄하지 않았고, 나는 의자에 앉아 가볍게 긴장을 풀었다. 희미한 빛을 빌어 옆 좌석의 히데키를 바라보자, 그 역시 이를 느낀 듯, 고개를 돌려 날 마주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1분…… 2분…… 3분…… 시간은 점점 흘러가고, 어둠은 그 기다림을 더더욱 길게 만들었다. 15분이 훌쩍 지났지만, 극장에는 빛이 돌아올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질서를 유지하던 스태프들이 손전등을 들고 분주히 오갔지만, 아쉽게도 이 거대한 공연장에 비해 손전등 몇 개의 빛은 너무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무슨 이유인지 작동하지 않는 예비전원, 그리고 오랜 기다림에 지쳐버린 관객들의 인내심은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조용했던 객석에서 항의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암소공포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 지금 상황은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