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번 책장
[내레이션]8번 책장으로 왔다. '폴로 교관'은 소설이니까, 문학 책장에 있어야 정상인데…… 찾았다! 찢어진 초록색 북커버!
[아이하라 마이]주인님, 오노데라 씨가 아까 정리한 책들이 기억났대요.
[player]어?
[내레이션] '가든 파일'은 금방 찾았지만, 책장에서 꺼내려고 하는 그 순간 갑자기 마이와 오노데라가 다가왔다.
[오노데라 나나하]PLAYER, 신경 쓰지 말라고 하셨지만, 애초에 제가 정리한 책은 몇 권 안 돼요. 제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음? 벌써 찾으셨군요.
[내레이션]설마 날 따라왔을 줄이야. 결국 두 사람에게 초록색 북커버의 '가든 파일'을 들켜 버렸다.
[오노데라 나나하]PLAYER…… 이런 책을 좋아하셨던 건가요? 안목이 있으시네요.
[아이하라 마이]오노데라 씨도 추천하는 책인 건가요? 마이도 점점 기대돼요.
[아이하라 마이]……응? 저…… 저건…… 어라?
[내레이션]천진난만하던 마이의 얼굴이 순간 딱딱하게 굳어졌고, 입술이 바르르 떨리며 현실을 도피하려는 듯 눈빛이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내레이션]마이는 그 책이 자신이 잃어버린 '폴로 교관'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리고 나는, 다음에 이어질 절망적인 상황을 상상해 버리고 말았다……
[오노데라 나나하]이건 도서관 책이 아닌 것 같은데요.
[내레이션]오노데라는 왜 북커버가 씌워져 있는지 의아해하며 페이지를 넘길 테고, 그러다가 마이의 흔적을 발견할 수도 있다. 마이 성격상, 책에 이름을 써 놓았다고 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으니까.
[오노데라 나나하]마이 책이네요? '폴로 교관'…… 북커버로 숨기고 싶었던 건가? 하나 배웠네요.
[내레이션]마이는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이 책이 왜 여기 있는지 모르는 듯했다. 그러다가 내가 계속 이 책을 찾고 있었다는 게 생각났는지, 날 오해하기 시작했다……
[아이하라 마이]주인님, 일부러 마이를 괴롭히려고 하셨던 건가요? 마이…… 주인님한테 미움받는 거예요?
[오노데라 나나하]책으로 사람을 괴롭힐 생각을 하다니. PLAYER, 정말 너무하네요.
[내레이션]상상 속 두 사람은 싸늘한 눈빛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내레이션]잠깐, 이건 너무 나갔다. 쓸데없는 걱정은 그만하고, 어떻게 해결할지나 생각해 보자.
[player]정말! 진짜! 미안……!
[내레이션]어쨌든 마이의 비밀을 지켜 내야만 최악의 상황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난 모든 걸 거는 심정으로 오노데라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하는 포즈를 취했다.
[오노데라 나나하]PLAYER, 저는 그냥 알바지, 대단한 사람이 아니에요. 누군가가 고개를 숙이는 모습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구요.
[player]미안, 사실 내가 개인적으로 가져온 책이라 몰래 다시 가져가려고 했는데, 들켜 버렸네……
[오노데라 나나하]……당신 책이라구요?
[내레이션]두 사람은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노데라 나나하]당신이…… 이런 장르를 본다구요?
[player]그래! 난 이 책이 너무 좋아! 샀을 때부터 매일 가지고 다니면서 읽을 정도라고.
[player]오늘은 갑자기 마이가 도서관에 가자고 해서, 실수로 열람실에 들고 와버렸지 뭐야. 도서관 규칙을 어겨서 정말 미안해. 내가 폐를 끼쳤네.
[내레이션]나는 '도서관 규칙 제3조, 열람실에 개인 서적의 반입을 금지한다!'라는 문구가 비친 스크린 앞에서 한 번 더 고개 숙여 사과했다. 이렇게 한바탕 허튼소리를 떠들다 보니, 내 거짓말에 내가 속아 넘어갈 것만 같았다.
[내레이션]하지만 두 사람은 내 설득이 통하지 않은 듯, 여전히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이하라 마이]그…… 그럴 리가 없어요, 이 책…… '폴로 교관'이 어떻게 주인님 책일 수가 있죠?
[player]진짜야! 난 이 책을 제일 좋아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책이 바로 '폴로 교관'이라고!
[오노데라 나나하]정말 의외네요. PLAYER, 금지된 우정 같은 이야기를 좋아할 줄은 몰랐는데.
[지나가는 여자아이]엄마! 금지된 우정이 뭐야?
[여자아이의 엄마]쉿! 저런 이상한 사람은 쳐다보지도 마. 빨리 가자.
[내레이션]매장, 지금이 사회적 매장의 현장이다. 하지만 마이의 비밀을 지켜 주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쯤이야……
[player]어쨌든…… 이건 내가 실수로 가지고 온 책이야. 마이도 알지?
[아이하라 마이]네? 아니…… 그게……
[내레이션]오도데라를 설득하기 위해, 마이에게 눈빛을 보냈다. 마이가 좀 거들어 줬으면 좋겠는데.
[아이하라 마이]주인님…… 주인님은…… 정말 '폴로 교관'을 좋아하시는 건가요?
[player]마, 맞아.
[내레이션]그런데…… 마이가 날 보는 눈빛이 어딘가 이상했다. 감싸주어서 감동받은 것이 아닌, 이해받아서 기뻐하는 것에 가까웠다.
[아이하라 마이]그럼…… 주, 주인님은 순정파이신가요, 아니면 플레이보이이신가요? 파…… 파트너는 어땠으면 좋겠어요?
[player]……순정? 플레이보이? 파트너?
[오노데라 나나하]죄송하지만 잠깐 실례 좀 할게요…… PLAYER, 책 뒤에 바코드가 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해 보실래요?
[오노데라 나나하]혹시라도 도서관 책인데 본인 걸로 착각하시는 거면, 저도 윗사람한테 설명하기 힘들거든요.
[player]내 책인데 바코드가 왜 있겠어……
[내레이션]마이의 '가든 파일'에 도서관 바코드가 있을 리 없잖아? 그런데, 북커버를 넘겨 확인해 보니……
[player]바코드가 있잖아?! 이, 이상하다…… 왜 이 책에만 북커버가 씌워져 있지?
[오노데라 나나하]낡은 책들은 북커버를 씌워서 낡은 책장에 따로 보관하고 있어요. 이 '폴로 교관'은 책표지가 망가졌지만, 안은 멀쩡해서 여기 둔 거예요.
[아이하라 마이]근데 이 북커버, 마이 거랑 똑같네요?
[오노데라 나나하]마이가 추천해 준 건데 잊어버렸어요? 괜찮은 것 같아서, 제가 관장님께 사자고 말씀드렸어요.
[오노데라 나나하]근데 이 북커버, 튼튼하긴 한데 사람들이 험하게 썼는지 찢어졌네요.
[내레이션]도서관에서도 북커버를 쓴다고? 그런데 그게 마이 거랑 같은 거라고? 사실이라면…… 이게 다 오해였다는 건가?
[아이하라 마이]도서관에 있던 책이었군요…… 주인님도 이 북커버를 쓰시는 건가요?
[내레이션]우연히도 같은 북커버에, 우연히도 마이 뒤에 떨어져 있어서 난 이 책이 마이의 '가든 파일'이라고 확신해버렸던 것이다.
[내레이션]마음속에 있던 의혹이 솜사탕 녹듯 사라졌다. 하긴, 마이같이 착실한 아이가 개인 서적을 도서관에 가지고 올 리가 없었다. 그게 남들에게 보여주기 부끄러운 책이라면 더더욱 그렇고 말이다.
[player]……솔직히 말하면, 집에 이거랑 똑같은 북커버를 씌운 책이 있어서 헷갈렸나 봐.
[오노데라 나나하]호오…… PLAYER, 그럼 이 책은 빌리실 건가요?
[player]응…… 아, 아니. 이 책은 있으니까, 하, 하하하…… 다, 다음 권은 없어? 그걸 빌리면 좋겠네.
[오노데라 나나하]후후…… 가지고 올 테니까 잠깐만 기다리세요.
[내레이션]오노데라는 가기 전, 나와 마이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설마 들킨 건 아니겠지……
[아이하라 마이]저게 주인님 책이라고 했던 게, 설마 저 때문에…… 감사드려요.
[player]감사라니?
[내레이션]마이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뭐라고 중얼거렸지만, 난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깊은 안도감에 빠져 있다가 마이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아이하라 마이]그…… 아, 아무것도 아녜요.
[아이하라 마이]주인님, 책은 아무 데나 놓아 주셔도 돼요.
[player]응, 그럼 탁자 위에 둘게, 후……
[내레이션]신사로 돌아온 우리는 둘 다 숨을 가쁘게 내쉬었다. 책이 이렇게나 무거울 줄 상상도 못했고, 반씩 나눠서 들었는데도 오는 길에 몇 번이나 쉬었는지 모르겠다.
[player]이제야 좀 쉴 수 있겠어. 이번 도서관 여정은 정말 우여곡절이 많았네.
[아이하라 마이]고생하셨어요, 주인님. 마이 때문에 이상한 오해까지 받으시고……
[내레이션]무녀들이 하는 수행 덕분일까, 마이는 보기보다 약하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책이 무거워서 힘들었을 텐데도 계속 내게 도서관 사건의 자초지종을 물어보는 게, 아무래도 그때 내 형편없는 말솜씨에 아무도 속지 않았나 보다…… 결국 난 마이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아이하라 마이]주인님께서 마이를 위해 그렇게까지 해 주셨는데, 마이는 그것도 모르고…… 감사합니다, 주인님.
[player]오는 내내 고맙다고 했잖아, 이제 그만해도 돼. 이번 일은 다 오해였고, 난 도움도 안 되고 오히려 너희를 혼란스럽게 했어.
[아이하라 마이]그럴 리가요, 주인님께서 마이를 얼마나 많이 도와주셨는데요. 주인님이 없었더라면 마이는 분명……
[player]분명?
[아이하라 마이]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마이가 궁금한 게 있어요. 주인님은 그때…… 그러니까 그 책이 '가든 파일'인 줄 알았을 때, 왜 마이를 비웃지 않으셨나요?
[내레이션]그러더니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마이 얼굴이 점점 빨개지고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선, 쭈뼛거리면서도 토끼 같은 눈으로 시선만큼은 나를 향하려 애쓰고 있었다.
[내레이션]난 금방 기분이 풀려, 나도 모르게 더 진지하고 부드럽게 대답해 주었다.
[player]걱정 마, 난 절대 마이를 비웃지 않을 거니까.
[player]그 연애시집처럼, '폴로 교관'도 모든 사람들의 취향에 맞기는 힘들겠지. 하지만 정성을 다해 쓴 작품인 만큼 분명 감동받는 독자도 있을 거야.
[player]그래서 그게 마이 책인 줄 알았을 때도, 난…… 그저 마이가 부끄러워하지 않기만 바랬어.
[아이하라 마이]흑…… 감사해요, 주인님. 주인님이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까, 마이는…… 너무 기뻐요……
[내레이션]내 말을 듣더니 마이는 더 부끄러워했다. 좋아서 입가에 미소를 감추지 못하면서도 차마 고개를 들고 날 쳐다보지는 못했다.
[아이하라 마이]아…… 마이가 차를 좀 내올 테니, 주인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아……
[내레이션]고개를 숙이고 걷는 게 위험하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부끄러워하던 마이는 주방으로 달려가다가 문 앞 책장에 머리를 부딪혔고,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 같았다.
[player]조심해!
[내레이션]나는 급하게 마이를 붙잡으려 했지만, 순간 힘을 너무 줬는지 마이를 눈앞까지 끌어당겼다.
[player]앗?
[내레이션]마이가 내게 닿지 않도록 급하게 어깨를 받치다가 도서관에서 했던 얘기가 떠올랐다. 마이는 다른 사람과 몸이 닿는 게 익숙하지 않다고 했었는데.
[player]괜찮아? 앗……
[내레이션]어쩔 수 없는 상황이긴 했지만, 나랑 마이는 너무 가까웠다. 손가락만 닿아도 까무러칠 듯 놀라던 마이가 지금 이런 자세로 있다니…… 마이가 얼마나 난리 법석을 칠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아이하라 마이]……감사합니다, 주인님. 마이는…… 괜찮아요.
[내레이션]마이를 놓아 줘야겠다고 결심한 그 순간, 마이는 혼자 똑바로 서더니 내게 감사 인사를 했다.
[player]아, 괜찮다니 다행이네.
[내레이션]놀라운 것은, 마이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내게서 천천히 떨어지더니, 묵묵히 옷을 매만질 뿐이었다.
[아이하라 마이]그럼 마이가 금방 차를 내올게요, 감사합니다. 주인님……
[player]으…… 으응……
[내레이션]마이 얼굴에 붉게 달아오른 홍조만이 가실 줄을 모르고 남아 있었다.
[player]……이상하네, 이제 몸이 닿아도 괜찮은 건가?
[내레이션]아까 도서관에서는 손가락만 닿아도 그렇게나 당황하더니, 지금은 왜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라면, '폴로 교관' 사건밖에 없는데……
[player]음…… 그것 때문에 그런 건 아니겠지. 다 오해라고 설명했으니까, 차나 마셔야겠다.
[내레이션]나는 책장으로 가서 물건들을 원래대로 세워 놓고, 떨어진 책들을 꽂아 넣었다. 그리고 물건을 줍다가 펼쳐진 책 한 권을 보았는데…… 머리글에 '폴로 교관 제3권'이라고 적혀 있었다.
[내레이션]책을 주워 살펴보았다. 익숙한 표지에 초록색 북커버. 이걸 보니 방금 도서관에서 있었던 일들이 다시 머릿속에 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내레이션]왜 마이가 지나간 길에 책이 떨어져 있었던 거지? 왜 마이가 그렇게나 당황했던 거고? 마이가 자꾸 '폴로 교관'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봤던 건?
[내레이션]머릿속에서 온갖 의혹이 복잡하게 뒤엉키다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내레이션]도서관의 '폴로 교관' 제4권은 사실 마이가 빌리려다가 실수로 떨어뜨린 '가든 파일' 다음 편이다. 그리고 사실 마이는 '폴로 교관'을 좋아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대놓고 말하지는 못했을 거고, 그래서 내가 책을 꺼낼 때마다 그렇게 긴장하면서, 계속 책에 대해 물어봤던 거지.
[player]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떨어져 있는 책 한 권만으로, 나 PLAYER,이렇게 추리했습니다.
[내레이션]머릿속으로 혼자 신나게 추리 게임을 하다가, 차가 다 끓여졌을 것 같아,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펼쳐져 있던 책을 다시 꽂아 넣었다.
[내레이션] '가든 파일'은 마이가 숨기고 싶었던 비밀이다. 그게 사람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이라면, 내가 계속 지켜 줄 것이다.
[player]가끔은 진실을 묻어 두는 편이 더 좋을 때도 있지.
[player]……그러고 보니, 순정, 플레이보이, 파트너…… 이게 무슨 뜻이었을까? 마이를 더 알아가려면, 이런 쪽을 더 공부해 봐야 하려나?
[내레이션]컴퓨터를 켜고 궁금했던 키워드를 몇 개 검색해 보았는데……
[내레이션]그날 밤, 나는 신세계를 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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