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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 옆으로 가 본다

[player]난 먼저 네 말을 한번 보고 싶어, 너랑 같이 우승을 했던 그 말 말이야. 그렇다, 히데키가 이곳에 온 목적도 원래는 자신의 말을 보기 위함이었다. 그러자 히데키는 내 요구를 흔쾌히 승낙하며 날 마구간으로 안내해 주었다. 푸릉― 마구간에 도착하자, 안에서 흥분한 듯한 말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말은 자신의 주인이 방문했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인지, 미리 인사를 하는 것만 같은 모습을 보였다. [player]아직 히데키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을 텐데, 어떻게 알았지? 말과 기수는 서로 이어져 있기라도 한건가? [아케치 히데키]하하, 저희가 대화하는 소릴 들은 거죠. 말은 시각보다 소리로 주인을 더 잘 기억해요. 히데키는 그렇게 말하며 나를 마구간으로 데려갔다. 마구간은 넓고 깨끗했고, 통풍도 잘 되는 곳이었다. 구유에 담긴 충분한 사료와 말의 발밑에 깔려있는 볏짚을 보니 말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보더라도, 신경써서 관리된 말임을 알 수 있었다. 난 시선을 말에게 돌렸다. 말의 모습은 순백의 몸통과, 길게 휘날리는 갈기가 돋보였고, 작은 잡티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균형 잡힌 체형에서 넘치는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새하얀 준마가 히데키와 같이 있는 모습을 보자, 사람들이 '백마 탄 왕자'를 왜 그렇게까지 사랑하는지 것인지를 몸소 느낄 수 있었다. [아케치 히데키]괜찮아요, 이 아이는 순해서 사람을 공격하지 않는답니다. 더 가까이 와 보세요. [player]고마워, 그냥 좀 놀랐을 뿐이야…… 이 말이 너무 아름다워서 말이지. 내가 본 말 중에 가장 아름다운 말이야! 푸릉― 그러자 말이 갑자기 콧김을 내뿜으며 긴 꼬리를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마치 은색의 섬광이 내 눈앞을 스쳐가는 듯했다. [아케치 히데키]은백, 그렇게 예의 없이 굴면 안 돼. 히데키가 가볍게 꾸짖자, 말은 고개를 숙이며 갑자기 침울한 모습을 보였다. [player]이름이 '은백'이야? 좋은 이름이네. 흠, 말이 좀 침울해 보이는데, 혹시 내가 뭘 잘못 말하기라도 했나? [아케치 히데키]아마 '멋있다'가 아니라 '아름답다'라고 말씀하셔서 그런 것 같네요. 은백은 수컷이라서 멋있다는 말을 더 좋아하거든요. [player]어?! 그걸 알아들었다고? [아케치 히데키]다 큰 말의 지능은 5, 6살 아이와 비슷해서 호기심이 왕성한 데다가, 사람의 행동도 곧잘 따라해요. 그리고 기분이 나쁠 땐 심술도 부리면서 누군가가 달래 주길 바라기도 하죠. 절대 얕봐선 안돼요. [player]미안해 은백, 내가 실수했네. 다시 말할게, 넌 역시 내가 본 말 중에서 가장 멋진 말이야! 은백 [조야백]쉬쉬―― 은백은 쾌활하게 울음소리를 내뱉었다. 말이 통하지는 않지만, 나는 신기하게도 그 음성의 의미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마치 '그럼 이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문제삼지 않을게요.'라고 말하는 듯했다. [player]음, 정말 자존심이 센 녀석이네. [아케치 히데키]은백과의 오해를 푸신 모양이네요. 아무래도 PLAYER 씨와 은백을 가깝게 만들어 줄 교감 프로그램이라도 진행해야 하나 고민 중이었는데. [player]빠르게 가까워질 수 있는 행동이라면…… 역시 먹이를 주는 걸까? 나는 순식간에 핵심을 짚어냈다. 난 이치히메의 사육자로서, 이 방법의 효과에 대해서는 이미 그 누구보다도 자신하고 있었다. 내가 관심을 내보이자, 히데키는 사육사에게 은백이 가장 즐겨 먹는 당근을 가져와 달라고 부탁했다. [아케치 히데키]천천히, 너무 빠르게 다가가면 놀라 버려요. 저 건장한 모습에 속지 마세요, 은백은 사실 엄청 겁쟁이거든요. [player]아, 알았어…… 은백아 착하지, 너한테 줄 당근을 가져왔어, 이제 거기로 갈게…… 나는 조심스럽게 당근을 은백의 앞으로 가져다 두었고, 은백은 이내 앞으로 와서 냄새를 맡더니 입을 크게 벌리곤 거침없이 당근을 집어삼켰다. [player]천천히 먹어, 아직 많으니까. [사육사]은백이 이렇게나 쉽게 사람을 받아들인다고? 이건…… 말도 안 돼! [player]왜 그러세요? [사육사]은백은 온순한 성격이지만 경계심이 강해서, 낯선 사람이 가져다준 음식이랑 물은 절대 안 먹거든요. 아케치 선생님 말고는 이렇게까지 빠르게 녀석의 신뢰를 얻은 사람은 없었어요. [사육사]제가 처음 녀석의 사육사가 되었을 때에도, 신뢰를 얻기까지 무려 반 년도 넘게 걸렸었죠. 게다가 전 벌써 녀석을 보살핀 지 5년이 넘었는데도, 녀석은 아직도 제가 사료를 섞어 줄 때마다 옆에서 경계하는 눈초리로 쳐다보곤 해요. 사육사는 충격을 받았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끝내 원인을 찾지 못하고 의혹만을 품은 채 이곳을 떠났다. [player]풉, 사육사님께서 충격을 받으신 모양이네. 아무래도 그동안 은백의 신뢰를 얻기까지 엄청 노력해 오셨던 모양이야. [아케치 히데키]네…… 확실히 그런 것 같네요. 안 그래도 너무 힘들면 다른 사육사분과 교체해도 괜찮다고 제안한 적이 있긴 했었는데, 은백한테 승부욕이 발동하신 모양인지 곧바로 거절하시더군요. [아케치 히데키]다른 작업자 분들의 얘기를 들어 보니, 사육사님은 은백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아예 한 달 동안 여기서 같이 먹고 자고 했다는 모양이에요. 그렇게까지 하고 나서야 겨우 은백에게 마구간에 접근하는 걸 허락받을 수 있었던 거죠. [player]의지가 강하신 분이네…… 근데 경계심이 그렇게 강한 말인데, 히데키는 어떻게 은백이랑 친해지게 된 거야? [아케치 히데키]은백은 아버지께서 출장 중에 사들인 망아지였는데, 여러가지 이유로 출장이 끝난 뒤에도 녀석이 태어났던 곳에 그대로 두게 되었어요. 그리고 녀석이 두 살이 되고 나서야, 아버지께서는 은백을 이한시로 데려와 제게 주기로 하셨죠. [아케치 히데키]그 전까지는 저도 목장에 있는 말을 빌려서 훈련을 했는데, 본격적으로 말을 사육하게 되니 여러모로 혼란스러운 일을 많이 겪었죠. 특히 은백이 이갈이를 할 때가 됐을 땐, 이빨 하나가 안 빠져서 굉장히 고통스러워 한 적이 있었어요. 그땐 수액으로 영양을 공급해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죠. [player]그 다음엔? 네가 뽑아 줬어?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알아챈 모양인지, 은백은 머리를 들이밀며 주인에게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아케치 히데키]하하, 절 너무 만능으로 생각하시네요. 물론 PLAYER 씨가 원하신다면, 공부해 볼 의향은 있어요. [아케치 히데키]당시에 고용했던 수의사는 안타깝게도 경험이 부족한 탓에 이를 뽑지 못했어요. 그 탓에 은백은 거의 3개월동안 밥도 제대로 못 먹게 됐고, 결국 아버지께 부탁을 드려 해외에서 교수님을 초청하고 나서야 그 문제를 가까스로 해결할 수 있었죠. [아케치 히데키]이빨 문제는 은백 같은 순혈마들에게서 자주 보이는 질환이에요. 다행히도 유치를 뽑아내니 빠르게 회복할 수 있었는데, 제가 의사를 찾아줬다는 사실을 알기라도 했는지 그 뒤부터는 절 주인으로 인정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보니 우린 시합 때에도 다른 참가자들보다 호흡이 잘 맞았고, 결과적으로는 우승까지 할 수 있었죠. [player]듣고 보니, 내가 준 음식을 아무런 경계 없이 먹은 게 확실히 신기한 일이긴 하네! 혹시 나한테 어떤 특수한 능력이나 물건이 있어서 녀석의 환심을 살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나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복장을 살펴보며 그 이유를 찾고자 했다. 그러자 히데키는 옆에서 가볍게 웃어 보이더니, 손을 들어 내 행동을 제지했다. [아케치 히데키]사실 그렇게 이상한 일까지는 아니에요. [player]엥? [아케치 히데키]혹시 '말은 주인을 닮는다'라는 말을 들어 보셨나요? 만약 주인이 겸허한 인품을 가지고 있다면, 그 말은 규율을 잘 지키는 성격으로 자라겠죠. 하지만 주인이 승부욕이 강한 사람이라면, 그 말도 다른 말들을 괴롭히는 말썽꾸러기가 되고 말 거예요. [player]그럼 은백의 경계심이 심해진 건, 결국 히데키 때문인 거네? 히데키는 내가 자신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자, 한숨을 쉬며 내 귀쪽에 가까이 다가와선 조심스레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아케치 히데키]그러니까, 은백은 제가 {character:player} 씨를 믿음직하고 중요한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처럼, 절 따라서 비슷한 감정을 품게 됐다는 거예요. 하지만 아무리 작은 목소리라 할지라도 역시 말의 청력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은백은 마치 나와 히데키 사이의 비밀을 알아채기라도 했다는 듯 또다시 “쉭쉭”거리기 시작했지만, 히데키가 머리를 살짝 두드리자 다시금 조용해졌다. 그리고 히데키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몸을 돌려선 은백을 돌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돌아선 그의 뒷모습 속에서 빨개진 귓볼을 목격한 나는, 그 모습을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player]흐흠, 나도 히데키가 믿음직스러워. 이 대답이 히데키의 마음을 가라앉힌 것인지, 그는 곧 내가 알고 있던 익숙한 귀공자의 모습으로 다시 되돌아왔다. 그렇다…… 히데키는 은백과 마찬가지로, 정말 달래기 쉬운 사람인 것 같다. 잔잔한 여름 바람이 볏짚을 헤집은 뒤 마구간을 관통했고, 약간의 더운 공기와 함께 신선한 풀내음이 퍼져나갔다.